카피라이터에게 UX라이터 제안이 오다

2022. 5. 9. 16:58Work, 일/UX Writing

2020년 봄과 여름 사이. 카피라이터로서 4년 간 몰입한 첫 직장을 그만두고 광고업에 대해 고찰하던 때.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OO이네 팀에서 UX라이터 채용 중이라는데, 관심있어?"
"어... 뭔 라이터?"

 

UX는 원래 몰랐고 그 뒤에 라이터까지 붙으니 그렇게 생소할 수가 없던 기억. OO이에게 직접 들은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프로덕트 내에서 텍스트를 중심으로 유저 경험을 개선하는 일

 

 

'프로덕트 내 경험을 개선한다', 이 말인 즉슨 카피라이터가 프로덕트 밖에서 유저를 프로덕트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로 텍스트를 사용했다면, UX라이터는 프로덕트 안에서 유저를 체류시키는 역할로 텍스트를 사용한다고 '상대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글쓰기의 장르가 무궁무진하듯, 같은 라이터라도 내가 해온 경험과는 전혀 달랐다. 영상 매체 중심의 내 포트폴리오로는 지원이 어려워보이는 별개의 직무였다. 그럼에도 리서치하면 할 수록 흥미가 돋았다. 직업적 변화를 갖지 않더라도, 나의 도구함에 들이고 싶었다. 이유는 세 가지.

 

1. '이게 맞다'고 말할 수 있는 라이팅이 고파서
영상 매체용 카피를 쓸 땐 카피가 목적에 맞는 효과를 얼마나 달성했는지, 달성했다면 얼마나 기여했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그러니 ABCDEFZ안까지 되는 카피를 써놓고서도 어느게 맞는지 확신하기 어려웠고 최종 결정의 순간에는 결국 결정권자의 취향이 좌우한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계속 이래도 되나? 데이터 드리븐이 화두인 세상에서, 이게 맞나?  심지어 지인 엔지니어가 개발 중이라는 '카피 쓰는 AI'까지 거시적 관점에서 내 밥그릇을 위협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신기술과 변화가 가득한 IT업계가 좋다면, IT업계에서 내 커리어로 롱런하고자 한다면. 이제는 취향이 아닌 근거로 '이게 맞다'고 결정하고, 성과를 분석하고, 개선을 거듭하는 라이팅을 해봐야만 했다.

 

2. 좋은 브랜딩의 첫 단추,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지인들은 종종 농담 20 진담 80으로 '광고인 믿지마 다 사기꾼이야'하지만, 그런 광고인들에게도 '아 이건 아닌데' 싶을 때가 있다. 진짜 구린데(?) 진짜 좋다고 속이는 광고를 만들어야 할 때. 프로덕트와 브랜드가 따로 노는 의뢰가 들어올 때면 '좋은 브랜드의 출발점은 좋은 프로덕트'라는 브랜딩 불변의 진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서 좋은 브랜드뿐만 아니라 좋은 프로덕트에 대해서도 차츰 관심이 생겼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좋은 프로덕트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다는 막연하고도 발칙한 소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개발과 카피라이팅은 양파와 우주선 만큼이나 먼 단어였다. 이번 생애는 글렀구나 뒷통수를 긁적이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타난 UX라이팅은 그 교두보로 보였다. 물론 내가 만질 수 있는 영역은 '화면' 뿐이겠지만, 유저와 직접 접촉하는 영역이기에 브랜딩의 핵심 영역이기에 '프로덕트를 만드는 단계에서 브랜딩'을 해보고자 하는 내 욕심에 딱 들어맞았다.

 

3. 1세대의 기회는 귀해서
실리콘 밸리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UX라이터는 이제서야 수요와 공급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는 직무로, 지금이 막 1세대 탄생의 시점이다. 1세대라는 말은 곧 레퍼런스도 없지만 비교대상도 없는 세상에서 이것저것 해볼 절호의 찬스란 뜻이다. 물론 사서 고생할 절호의 찬스라는 말도 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찬스를 좋아한다. 1세대 콘텐츠 플랫폼에서 업을 시작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성장한 나에게 이제 '1세대'라는 키워드는 명백한 취향이 됐다. 선례와 노하우를 따라 안정적인 우상향을 그려나가는 것보다, 비록 롤러코스터일지언정 개척 스타일이 내 성향에 더 잘 맞는다. 물론 전자도 선례를 뛰어넘어야 하는 등의 분명한 챌린지요 개척의 기회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아무도 안 가본 길을 가는 '순수한 개척'의 기회에서 나는 더 큰 챌린지와 성취감을 느낀다.

 

위 이유로 나는 지인팀의 UX라이터 채용에 지원해보기로 결정했다. 합격이 목표는 아니었다. 시니어를 뽑는 자리에 UX 관련 경험이 아예 없는 내 경력은 불리함을 넘어 불가함에 가까웠고, 나 역시도 아직은 '전직'까지는 아닌 '스킬업'의 관점으로 접근한 것이기에 '과제/면접에서 실무 경험이나 해보자'는 마인드였다. 그런데 어라? 정신 차려보니 면접이네? 과제 전형까지 합격해 면접을 보게 됐다. 어라라??? 나참 이러다 진짜 되겠는데 허허 이걸 어쩐다 거울보며 절레절레하던 나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괜한 절레절레였음을.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다음 편에 계속-